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단 편집) ==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 [[라틴어]]: Ecclesiae Graecae Catholico Belarusica [[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кая грэка-каталіцкая царква (БГКЦ) [[영어]]: Belarusian Greek Catholic Church 브레스트 연합 당시 1595-96년 당시는 아직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민족 정체성이 생긴 것도 아니고 해당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은 [[루테니아]]인으로 정의되던 상황이었다. 즉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가 신설될 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따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정교회는 같은 전례를 공유했기 때문에 양 교파는 교리와 전례상으로는 차이가 없으며 오늘날 기준으로 예배 언어가 서로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로 갈라진다 뿐이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이 벨라루스를 완전히 장악할 당시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80%는 동방 가톨릭을 14%는 로마 가톨릭을 8%는 정교회를 믿었다. 물론 식자율이 높지 않던 당시 농민층이 이런 교파 상의 상세한 차이를 구분해서 고른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 제국에서 동방 가톨릭을 탄압하자마자 벨라루스의 루테니아인 상당수가 별 다른 저항 없이 정교회로 원복했다.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탄압한 것은 아니었고, 먼저 [[예카테리나 2세]]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에게 "당근"으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대교구"를 설립시켜 준 대신에, "채찍"으로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상당부분 제한시켜버렸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자국 내 정교회 주교를 선출할 때 연방 정부에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성직자에게 주교 자리를 허락한 것과 흡사한 맥락이다.] 결정적으로 1830~31년 폴란드 11월 봉기가 러시아 제국 정부에게 진압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에서 폴란드인 귀족 1만여 명을 귀족 계급을 박탈/강등시키고 봉기에 적극 가담했던 귀족 상당수를 [[시베리아]]로 유배보내거나 25년 기한으로 징집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정교회 개종 정책에 반대할 세력들이 증발해버렸다. 1839년 러시아 제국 정부는 [[폴라츠크|폴로츠크]]에 정교회 공의회를 설립하여, 1596년의 교회 연합을 무효화하고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을 정교회와 다시 통합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후 벨라루스에서 2세기 이상 교회 의식에 사용되던 교황의 이름 대신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이름이 불려졌다. 상술한 이유로 그리스 가톨릭의 정교회로의 통합은 농민층 사이에서 아무 저항 없이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1839년 이전 아직 벨라루스 인구의 70%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신도였으며 로마 가톨릭이 약 17%, '''정교회가 6%, 유대교가 7%''', 개신교와 이슬람교 등이 2% 정도였으나, 통합 선언 이후 정교회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으로부터 150만여 명의 신도와 1607개의 교구를 흡수하며 벨라루스 내 최대 종파가 되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역시 일부러 벨라루스인 농노들을 부리는 [[폴란드인]]/친폴란드파 귀족들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벨라루스 지역에만 특별히 지주들에게 불리하고 농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토지 상환금이 책정되었는데,[* 반대로 같은 농노 해방 시기에 꿀땅이 많았던(다시 말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기득권 귀족층의 소득과 직접 연계되어 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최대한 농노에게 불리하고 지주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토지 상환금이 책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가톨릭을 고수하던 귀족들은 아예 다른 폴란드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으로 종파를 갈아타고, 농민들은 러시아 정교회로 갈라서버리면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완전히 몰락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벨라루스인 민족주의자들이 근세 벨라루스 문화 르네상스에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교회를 복구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으로 벨라루스 지식 계층이 거의 전멸하면서 교세를 복구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서는 동방 가톨릭을 폴란드 지주들의 압제의 유산이라고 탄압하면서 교세는 계속 축소되었고, 한때 2백만 신도를 자랑하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은 오늘날 신도가 전세계에 7천여 명만 남을 정도로 교세가 축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